떼제에서 맞는 세번째 아침이다. 첫날 아침은 지각했고, 둘째날은 못 갔고, 드디어 오늘이 되어서야 제대로 morning prayer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침기도는 낮과 저녁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갖는다. 성찬을 하고 주기도문을 노래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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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기도를 마친 뒤 오늘도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한 아침식사를 한다. 바게트 몇 조각과 버터, 핫초코가 늘 우리의 식사의 전부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맛있다. 남기는 것 없이 냠냠 싹싹 먹은 뒤 La morada 라모라다에 가서 수사님과의 약속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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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의 일일 프랑스어 선생님이 되어준 Crystelle 할머니를 라모라다에서 만났다. 그녀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오늘 점심에 떠난다고 했다. 파리에서 살짝 떨어진 지역에 살고있는 그녀가 괜찮다면 다음 주에 놀러오라고 한다. 남편과 상의해보겠다고 했다. 아마 일정상 가보기 어렵지않을까 생각하는데, 우리가 유학을 오게된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 내가 크리스텔과 얘기하는 사이 남편은 수사님과 전화통화를 했다. 내일 5:30pm에 라모라다에서 만나는데 혹시 한국인이 더 있는지, 있다면 같이 왔으면 하시는 눈치셨다. 첫 날 도착할 때 외에는 아직 그 분들을 못 뵌 상황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알겠다고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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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잡은 뒤 라모라다를 나오자마자 바로 그 한국인 2분을 만났다. 다가가서 내일 우리가 이 곳에 계신 한국인 수사님을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같이 가시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시겠단다. 어쩜 딱 이 때 만날까. 내일 만나기로 하고 남편은 big kitchen으로 나는 source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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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정한 Radek. 여러가지 할 일이 많은지 늘 약속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온다. 오늘부터는 책을 가져갔다. 만약에 사태에 우리가 침묵해야하거나, 내가 그를 기다려야 한다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외투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책 덕분에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보기에 좋다고 대답한 뒤 5초 후에, 사실은 별로라고 그것도 점점 별로라고 하니 그가 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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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와서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첫 날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했는데 이 곳에서 침묵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질 수록, 또 유럽 사람들이 익숙해 질 수록 내 맘에 안 드는 점들이 보이고 그 점들은 결국 내가 포용하지 못해서, 또는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부족해서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또한 나의 나쁜 마음과 어두운 점들이 보인다. 어제 저녁기도 시간에 그랬고, 밥을 먹을 때도 그랬다. 그 점들이 나를 너무 괴롭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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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내 얘기를 찬찬히 들은 라딕이 그에게도, 또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음을 얘기하며 나를 위로한다. 더불어 말 많고 탈 많은 10대들에게는 지금이 침묵을 지키며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조금 녹아내린다.
오늘도 마침 사람이 없어 1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게 라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오늘 아침에 2월까지 머물지 아니면 9월까지 머물지 선택해야한다는 담당수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9월까지 머무는 것은 그에게 무리가 있어 2월 내로 짐을 싸서 폴란드로 돌아간다고 한다. 원래는 부활절까지 있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변동에 많은 것들을 바꿔야한단다. 무척 당황스럽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따르겠다는 그의 이야기에 나 역시 응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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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만나 점심 예배를 드리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늘의 점심은 토마토 강낭콩 리조토다. 별 것 없지만, 매끼 맛있게 잘 먹고 있다. 첫 날 먹기가 좀 어려웠던 스페인산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맛 없는 것 없이 모두 잘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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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뒤 오늘은 마을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교회는 초창기 떼제의 형제들이 기도했던 곳이다.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는 성당이지만 당시 파리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훗날 교황 요한 23세)가 떼제의 예배장소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사님들만, 그리고 나중엔 끝내 교구의 허락을 받아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함께 초교파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떼제 공동체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화해의 교회가 세워지기 전까지 모두가 여기서 기도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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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에 붙어있는 마을묘지에 하나님께 돌아간 떼제의 수사님들, 그리고 2005년 8월 16일 정신착란의 루마니아 여성에게 화해의 교회에서 살해당한 떼제의 창설자 로제수사님의 무덤이 있다. 떼제의 수사님들은 돌아가셔서도 묘지를 함께 쓰신다. 묘지가 무척 작기 때문이다. 한 곳에 여러 수사님이 묻히시고 하나의 나무 십자가의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늘려새긴다. 로제수사님의 무덤 역시 한 시대를 이끈 영성 지도자의 것 답지 않게 매우 소박하고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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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교회 앞에서 우연히 라딕을 만났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갈 거라고 하자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을 고요함을 맛 보라고 적극 권한다. 그를 뒤로 하고 들어간 교회는 오래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건물이지만 온화하고 아름답다. 그 앞에 기도의자를 사용하여 무릎을 꿇었다. 고요하다. 아주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않는 조용한 건물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과 아주 적은 조명만으로 이 교회의 단상이 빛난다. 우리는 그 곳에서 한참동안 기도했다.
돌아오는 길에 OYAK에 들러 나는 레몬맥주를 남편은 와인을 샀다. 홀짝홀짝 마시며 exposition에서 어제 보았던 책 중 한 권을 더 산다. 떼제로 가는 길이라는 책이다. 프린스턴에서 신학 박사과정을 하던 제이슨 브라이언 산토스가 2009년에 지은 책으로 떼제의 역사와 우리가 순례자로써는 알 수 없는 공동체 형제들과 장기체류자의 일과 과정들을 담았다. 방에 돌아와 조금 읽고 남편과 얘기를 나누다 3-4시간정도 함께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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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히게 저녁 먹을 시간에 눈을 떴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저녁밥을 받았는데 마침 책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강낭콩, 아기당근 그리고 소세지로 이루어진 식사를 받았다. 당근은 조금 먹기 힘들었지만 다른 것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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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라딕에게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일찍 자리를 잡기로 했다. 수사님들이 앉아계신 가운데 자리 중 가장 뒤, 가운데가 원장 수사님의 자리란다. 그 곳에 전에는 로제수사님이, 지금은 알로이스수사님이 앉으신다. 우리는 바로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알로이스 수사님의 얼굴을 뵙자 기품과 영성 그리고 평화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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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도시간이 무척 빨리 흐르는 것 같다. 마지막 곡을 부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군데군데 수사님들이 서 계신다. 그 중 한 분께 다가가 왜 서 계시냐 물으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서 계신단다. 그 분께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여기 처음에 왔을 때는 행복했는데 매일매일 지날 수록 기분이 안 좋아지고 있으며 나의 나쁜 점들이 보여서 슬퍼진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남편과 라딕에게 얘기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그 분의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데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다음날 성함을 여쭤보니 Brother Paulo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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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우리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아신 그 분은 Brother Han-Yol을 만났냐고 하신다. 내일 만날 계획이라고 하니 그 분과 아마도 모국어를 사용해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며 잘 됐다고 이야기 하시고 당신의 말을 덧붙이신다. 우리가 평소에는 바쁘게 사느라 우리 안의 것들을 보기 어렵지만, 이 곳에 와서 많은 생각을 하고 고요히 지내다 보면 그것들이 보이게 된다며. 때로는 내 마음 안에 나쁜 것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신다. 말들이 위로가 되어 응어리를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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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알 수는 없을거다. 더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할 거다. 그래도 내일은 좀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이 곳에서 하루하루 한 번의 기도라도 더 드리며, 좋은 사람들과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지내다가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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