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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7 Paris, France

열번째 날 일기 (수정중)

오랜만에 글을 적는다. 그동안 은근히 떼제에서의 하루하루가 바빠 글을 적을 여유가 없었다. 5시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던 파리, 만하임에서의 생활과 달리 떼제에서는 기도회가 끝나면 10시, 이것저것 잘 준비를 하고 하루를 생각하면 11시, 12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다보면 다음 날이 되고 다음 날은 그날그날의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느라 바빴다. 6일 (제대로 보낸 날만 세었을 때) 중 3일은 적응하는데에, 3일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체화하는데에 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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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는 아침에 부지런히 아침기도를 드렸다. 수요일부터는 아침에 기도를 나가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와 큰 무리없이 아침기도를 잘 드렸다. 아침기도를 드리면 아침밥을 먹는다. 아침밥은 거의 언제나 초콜릿과 작은 바게뜨와 핫초코(또는 티),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터나 치즈가 같이 나온다. 처음에는 다소 부족한 듯이 느껴졌지만 어느순간부터 충분하고 만족한다. 밥을 먹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가 그런 모양이다. 떼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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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면 남편은 딱 big kitchen에 갈 시간이 되고 나는 1시간 정도 여유가 생긴다. 책을 읽기도 하고 그동안 못 올린 사진을 올리기도 하며, 때로는 화해의 교회에 가서 누워있기도 한다. 11시 10분 전에 어김없이 Radek을 만나 함께 천천히 Source에 들어가며 대화를 하기도 하고, 침묵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그래도 조금 사람이 있는 편이라 서로 침묵하고 각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앉아 ‘떼제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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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오약에 갔다. 어제 먹었던 레몬맥주가 무척 인상적이고 맛이 있어서 오늘은 자몽맥주를 시도했다. 자몽맥주가 훨씬 맛있다. 물론 알코올의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미미한 정도의 술이지만 살짝 가미된 알코올은 사람을 조금 업되게 해주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많은 알코올은 나에게는 별로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남편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사양한다. 나에겐 더 잘 됐다. 혼자서 홀짝홀짝 다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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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갔었던 마을교회가 무척 인상적이었던 우리는 오늘도 가보기로 한다. 어제는 기도로 마을교회에서의 시간을 보냈다면 오늘은 독서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 가져간 책을 읽는다. 나는 낮부터 읽던 ‘떼제로 가는 길’을 남편은 ‘샘에서 생기를’ 이라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과 로제 수사님이 공저하신 책을 읽었다. 원래 이 시간은 클라우스와 함께 노래연습을 해야하는 시간인데 떼제 노래도 많이 익숙해졌고, 10대 아이들이 많기에 어제부터는 살짝 빠지고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 좋은데 길에서 우연히 클라우스를 만날 때 조금 미안해진다.
교회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방에 와서 수요일의 이야기를 쓰고 처음으로 손빨래를 했다. 물론 파리에서도 손빨래를 조금 했었지만 오늘은 티셔츠와 양말, 바지까지 빨아야했기 때문에 최초의 제대로 된 손빨래였다. 샤워실에서 하나씩 하나씩 빨며 녹번동의 우리 집을 생각했다. 집에서는 당연히 세탁기가 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옷을 벗고, 쉽게 갈아입는다. 심지어 아주 적은 빨래조차도 세탁기에 넣고 두시간 동안 세탁-헹굼-탈수의 과정을 거치게 만든다. 또 그것마저도 나중에 널어야겠다고 미뤄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내가 이렇게 손빨래를 하기 때문에 옷도 가능하면 깨끗하게 입으려고 하고 몇 번씩 돌려가며 더 입는다. 속옷이나 양말 같은 작은 빨래들은 샤워를 하면서 같이 빨기도 한다. 여행하면서 철드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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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렇게 부지런을 떤 이유는 오후에 수사님을 만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떼제에 올 때 만났던 한국인 여성 2명과 함께 La Morada 라 모라다에서 오후 5시반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곧이어 두 여성분들도 들어오셨다. 같은 나라 사람이지만 막상 만나니 쭈뼛쭈뼛 서로 말이 없다. 우리는 책상에서 신문을 보고 두 분은 다른 나라의 남자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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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수사님이 도착하셔서 갑자기 “안녕하세요. 신한열 수사입니다. 저는 한국말 조금밖에 못합니다. 일본노므 사라므입니다. 니홍고 대끼마스까?(이렇게들렸다)” 하셔서 갑자기 넷이 멘붕이 됐다. 한국분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재일동포셨나. 이게 진담인가 농담인가 네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농담일거라 생각하며 안쪽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오순도순 둘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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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자기소개부터 시작한다. 여성분부터 소개를 시작했는데 신학과 사진을 공부하신댔다. 남편 차례가 되어 종교철학과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니 수사님께서 감신이냐며 바로 알아보신다. 깜짝놀라 어떻게 아셨냐고 여쭤보니 전공을 들으니 바로 감이 온단다. 맞은편의 여성분들이 갑자기 동요하는 눈치다. 알고보니 그 분도 감신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다. 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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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알고있는 주제가 비슷하니 자연스럽게 관련된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약 1시간 동안 넷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한국에서 있던 일, 떼제에서 있던 일, 수사님께서 한국과 떼제에서 하시는 일들을 얘기하고 들으면서 이곳에서 생각치도 못한 이런 인연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것도 감사한데 수사님께서 언니들(소개를 쭉 들어보니 언니들이셨다! 동생인줄 알았는데!)에게 양해를 구하시고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셨다. 언니들에게 수사님께서 직접 담그신 김치를 조금 건네시고 또 다른 김치병을 들고 우리를 El Abiodh 엘 아비옷으로 안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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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숙소 재배정 문제로 왔던 엘 아비옷에 대한 이미지는 사무실이었는데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레스토랑처럼 작은 단위로 나누어진 방이 보였다. 수사님들의 가족이나 친구들, 또 함께 식사나 티타임을 나눌 분들이 왔을 때 이곳으로 모셔서 함께 음식을 나눈다고 했다.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되어있는 방에 들어가니 아담하지만 아름답고 정갈했다.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떼제의 노래 ‘Ubi Caritas 사랑의 나눔’을 노래한 뒤 짧은 수사님의 기도로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고 감사했다.
음식은 정말 꿀맛이었다. 우리가 유럽에 와서 먹은 음식 중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않게) 식사를 나누며 본격적으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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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와서 남편이나 나나 느끼는 바가 엄청나게 많고 또 이곳의 문화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우리가 공부하는 분야의 뿌리가 이곳에 있는 만큼 확실히 좀 더 자연스러워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유학을 해야하는 이유가 충분할까? 한국에는 유학을 가신 적이 없지만 깊이 있는 설교와 음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유럽에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지식을 거저 주는 것도 아닐텐데 여기서 살며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훌쩍 유학을 떠나기엔 우리의 나이가 (물론 젊지만) 적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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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80년대에 한국을 떠나 90년대부터 정착하여 30년을 살아오신 분에게 여쭤보면 뭔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삶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 또한 한 명의 깊이 있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 두 가지를 훌륭하게 해내고 계신 분께 듣는 이야기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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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수사님의 조언은 매우 현실적이며 이상적이다. 마치 떼제공동체 같다. 이 공동체에 와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균형이다. 이상과 현실간의 균형, 종교와 인간간의 균형, 수사와 순례자 그리고 장기체류자와의 균형. 더 나아가 음악과 건축과 공간디자인의 균형도 매우 조화롭다고 느꼈었다. 수사님의 대답 역시 그러했다. 우리가 궁금해했던 수사님의 언어능력, 또 이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더 나아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 정착할 사람으로서 유학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다각도에서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수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유학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학위의 압박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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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도 좀 더 나누고 사진도 찍고 싶은데 벌써 8시 20분이 되었다. 8시 30분에는 기도가 시작한다. 조금 서둘러 설거지를 하고 김치를 먹었으니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바쁜 와중에 카모마일 티도 한 잔 마셨다. 수사님께서는 토요일에 만나서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셨다. 내일쯤 다시 라 모라다에 들러 약속을 잡아야겠다. 남은 김치는 병과 함께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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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서둘러 저녁예배에 들어갔다. 어떻게 이런 꿈같은 시간이 있을까. 생각치도 못했던 환영과 환대에 몸둘바를 몰랐던 저녁이었다. 그리고 더욱 더 좋았던 것은 이 모든 대접과 배려가 더없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방에 돌아와 바로 골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