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첫번째 스케줄을 마치는 날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아침을 먹는다. 세번을 같은 식사를 먹으니 요령이 생긴다. 크림치즈와 사과, 오렌지쥬스를 꺼내 Elodie와 Gael이 대접한 아침에 우리 맘대로 옵션을 붙인다. 식탁이 더욱 풍성해졌다. 아침을 든든히 먹으니 또 하루를 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기 전에 편지를 쓸까 싶어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살펴보니 뒷 쪽에 엽서같은 페이지가 있다. 한 장을 뜯어내어 한 자 한 자 채워본다. 마지막에 왠지 불어도 쓰고 싶다. 내 맘대로 메르시 보꾸 mecri bouque라고 적었다. 혹시 몰라 한번 찾아보니 merci beaucoup 이다. 낭패다. 본의 아니게 색색의 포스트잇으로 장식을 하게됐다. 그래도 다 쓰고나니 정성도 있어보이고 받는 사람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조심스럽게 입구에 올려놓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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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속열차를 타고 독일로 넘어가는 날이다. Gare de l’Est 파리 동역에서 탈 수 있다. 파리는 TGV, 독일은 ICE라는 열차가 우리나라의 KTX에 해당하는 열차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서 온 표라 따로 티켓을 발권 받지는 않아도 된다. 다만 유럽은 기차망이 전부 연결되어있어서 한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전 지역에서 연착이 된단다.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하여 긴장하며 기다렸다. 꼼꼼한 우리 남편은 전광판도 확인했다가 레일유로 어플도 확인했다가 또 ICE에서 운영하는 어플도 확인한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세계 어디서든 길 찾기의 달인이 됐다. 레일유로에는 연착이라고 뜨는데 다른 곳에는 그런 소식이 없다. 일단 이 곳에서 탈 수 있다는것은 확실해졌으니 기차 플랫폼 바로 앞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마시며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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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와서 제일 처음으로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했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여의치않아서 계속 참아왔었다. 오늘이나 내일 쯤은 한 잔 마시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적재적소, 적시에 스타벅스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더불어 2시간+a를 기다려야하는 상황에서 좋은 자리까지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Cafe Latte venti 사이즈에 바닐라 시럽을 추가하니 5유로 정도 된다. 외국에서는 스타벅스 컵에 고객의 이름을 적는다. 나에게도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은별이라고 말했다간 천년만년 스펠링 알려줘야될 것 같아서 유니스 Eunice 라고 했더니 Yunis 라고 적고 맞냐고 묻는다. 뭣이 중한디 싶어 웃으며 맞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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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나눠먹으며 각자의 일에 잠시 몰두한다. 나는 사진을 정리하고 남편은 길을 찾으며 다음 노선을 계획했다. 그러고보니 스타벅스 배경음악으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온다. 아주 자연스럽다. 음악을 가만히 듣다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곡이 나왔다. G. Faure의 Siciliane. 프랑스에서 포레를 듣는 기분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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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길에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파리 동역 중앙에 놓여있는 피아노에서 어린 자매가 연탄곡을 치고있다. 내일 시험도 봐야하니 손 풀겸 한번 쳐볼까 싶어 0.7유로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대신 깨끗했다) 화장실에 얼른 다녀와서 자매가 일어나자마자 총총 가방을 매고 그 앞에 앉는다. 한국 떠나고나서 처음 쳐본다. 스르륵 손을 풀어봤다. 쇼팽을 치고 싶은데 손이 돌아갈지 의문이다. 대신 안전한 베토벤 소나타 18번 2악장을 쳐본다. 중간까지 친 뒤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바흐 영국조곡 2번 prelude를 중간에서 마무리했다. 일어나보니 사람들이 내 주위에 서 있다. 아까 피아노를 치던 자매도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기분이 엄청 좋다. 자매의 어머니가 “You are very inspired to my children.” 하고 웃으며 지나간다. 아이들과도 눈 인사를 했다. 사람들과 통하는 음악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국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다. 아 더 멋있는 곡들이 많은데! 그러나 가야할 시간이다. 떼제에서 파리로 돌아왔을 때 다시 한 번 쳐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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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되어 ICE를 타러 가는데 흑인 여성 두 분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한다. Sure! 우리 같은 관광객인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줬다. 기차에 올라 우리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이 있고 상대편과 마주보는 자리다. 정말 우연히도 아까 사진을 찍어드렸던 그 분들이다. 살짝 인사하고 각자의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앞에서 갑자기 위스키와 얼음을 꺼내시더니 셋팅을 하고 사진을 한 장 더 찍어달라고 하신다. 우리 엄마 연배정도 되어보이시는 분들이다. 전세계적으로 아줌마들은 똑같은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드렸다.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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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술기운이 올라오시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영어를 쓰다가 또 알 수 없는 말을 쓰다가 그 두가지가 함께 사용된다. 굉장히 많이 웃고 또 시끄러웠다. 오빠한테 한국어로 ‘앞에 두 분 취하셨나봐. 많이 시끄럽네.’ 하면서 그 두 분을 시끄러운 관광객으로 단정짓고 있었다. 그 때 한 분이 화장실을 가시자 내 앞에 앉아있던 다른 분이 어디서 왔냐며 말을 건다.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엄청 따뜻한 사람이다. 우리는 친구인데 파리에 오니까 너무 좋고 내년에 아이들과 다시 올 생각이라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왔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같이 시끄러운 관광객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응원도 받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기차를 타고 독일에 가면서도 잘 하는 건가 계속 의문을 가졌었는데 잘 하고 있다고, 좋은 경험이고 값진 경험이라고, 그렇게 누군가가 작은 격려를 보내주는 것 같아 너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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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15분쯤 걸려 Mannheim Hbf에 도착했다. 지역 이름 뒤에 Hbf (Hauptbahnhof. 반홉) 이 붙는데 왜 붙는가 했더니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중앙역이라는 뜻이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기차표가 없기때문에 도착하자마자 Taize 떼제로 가는 표를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기계가 말을 안 듣는다. 몇 번을 시도하는데도,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표가 있는데도, 예매할 수가 없다. Musik hochschule (국립음대) 연습실이 24시간이 아니라 밤 9:30까지라는 이야기를 들었기때문에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우리는 일단 Staatliche Hochschule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Mannheim (만하임 국립음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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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살피며 10분쯤 걸어갔을까? 구글지도가 말하는 자리에는 학교가 없었다. 그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학교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다급해졌다. 가장 눈에 띄는 스타벅스 사진을 찍고 한양대에서 만난 요나오빠에게 SOS를 친다. 다행히 오빠가 거의 바로 보고 영화관 옆에 학교가 있다고 말해줬다. 오면서 다른건 다 기억이 안나는데 영화관은 봤었다. 오빠가 말할 곳으로 가보니 거기에 학교가 있다. 휴.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도, 9:30pm까지 연습할 수 있다고 알려준 사람도 요나오빠였다. 이번에 오빠에게 진짜 신세를 너무 많이졌다. 한국에 오면 정말 맛있는 밥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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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니 1층에 한국어가 들린다. 쇼파에서 한국 분 두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죄송한데 연습실이 어디냐고 여쭤보니 건물 지하 1층과 2층으로 가보라고 한다. 짐이 있기때문에 지하 1층으로 갔다. 연습실이 다 차있고 어떤 분은 예약해야된다고 하신다. 요나오빠가 알려준 또 다른 건물의 6층에 가본다. 여기도 연습실이 있다. 우리와 함께 내린 분도 연습실을 찾는 눈치다.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하나씩 하나씩 소리를 들어본다. 모두 사람이 있다. 포기해야하나 하는 그 순간 내 앞에 빈 연습실이 나타난다. 오 주여. 주여 소리가 정말 절로 나왔다. 살았다. 여기 오려고 그렇게 힘이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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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더 연습해야되는 나는 짐을 내려놓고 바로 연습을 시작하고 오빠는 기차표를 해결하러 나갔다. 연습실에 앉아 천천히 피아노를 쳐본다. 이 학교는 연습실에도 Steinway가 있다. 정말 클래스가 다르구나 싶다. 여기가 어디라고 또 연습을 하고 있을까. 아까 오면서 느꼈던 독일의 거리가 바흐와 베토벤을 치면서 상기가 된다. 아 그래, 이런 곳이라면 이런 논리로 음악을 쓸 수 있었겠구나. 내 마음 안에서 음악을 대하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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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연습하는데 오빠가 돌아왔다. 표를 못 구했다고 말한다. 근데 14년쯤 만나니까 이제 목소리만 들어도 농담과 진담을 구분한다. 저건 농담이다. 쿡쿡 찌르니 표를 짜잔하고 보여준다. 우리가 미리 예매를 할 수 없었던 이유, 프린트가 아닌 종이티켓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리 예매했으면 정말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는데 임박해서 구하니 표가 정말 비싸다. 남편한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가 욕심을 내서 여기까지와서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이 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시험을 칠 수 있을까 싶어서 이 여행 일정에 입시를 넣었다. 그걸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만하임은 관광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정말 순전히 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다시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데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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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15분이 되었다. 이제 숙소를 찾아갈 시간이다. 원래 체크인을 낮에 했어야 했는데 연습을 해야된다는 우리의 요구를 호스트가 특별히 들어주었다. 트램을 타고 갈까 하는데 기차표도 비싸게 구매한탓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고 초행길이지만 걷기로 한다. 남편이 지도를 들고 앞장선다. 처음 오는 나라에서 초행으로 집을 찾아야되는 상황이 되니 남편도 긴장해서 유심히 그리고 꼼꼼히 지도를 본다. 나도 100% 남편만 믿고 따라간다. 다행히 헤매지않고 도착했다. 짐이 있는 탓에 30분 거리를 40분이 넘게 걸려 왔다. 숙소에 도착해서 호스트에게 연락하니 10분 정도 뒤 그들이 도착했다. 오늘의 호스트도 커플이다. Ben과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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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빠가 인사를 나눈 뒤 갑자기 마리아에게 Where are you from? 이라고 묻고 그녀가 I’m from Mexico. 라고 대답했다. 음? 왜 물어보지, 저걸 갑자기. 뭔가 웃기다. 독일인처럼 안 보여서 물어보나? 어쨌든 숙소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그들은 돌아갔다. 오빠한테 왜 그렇게 물어봤냐고 깜짝 놀랐다고 엄청 웃었더니 오빠가 그제서야 아 그래서 걔가 그렇게 대답했구나 한다. Where did you come from? 지금 어디서 왔냐고 묻고싶었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오빠는 자기 질문을 얘가 잘못 이해했나보다 했었다고 한다. 한참을 놀리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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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파리의 숙소에 비해 청결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다. 침대도 작고 이불도 없다. 그렇지만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다.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화장실도 보다 자유롭고 빨래도 맘껏 널고. 청소도 조금 덜 신경써도 된다. 처음으로 냄새 신경 안 쓰고 라면도 끓였다. 그런데 보고 말았다. 커피포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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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포트 안에 모기향 같은게 있길래 오빠에게 이거 뭐냐고 물어보니 유럽은 물 안에 석회질이 들어있어 커피포트를 오래 사용하면 이렇게 된다고 한다. 으악. 그랬구나. 그때부터 갑자기 음식 맛이 이상한 것 처럼 느껴진다. 라면 맛도 이상한 것 같다. 안 그래도 내일 시험 때문에 예민해져있는데 물 때문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징징대는 나를 남편이 다 받아준다. 핀잔이라도 한 번 줄 만 할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다 어르고 달래준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나고 결혼할 수 있었던건 98% 남편 덕분이다. 2%는 나에게 주겠다. 내 자존심이다. (ㅎㅎㅎ) 남편이 잘 보듬어준 덕분에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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