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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moments

아끼면 안돼요 feat. 타코야끼


2015년 광복절, 결혼하고 첫 살림을 녹번동의 작은 원룸에서 시작했다. 꽤 오랜기간 만났고 결혼까지도 염두했던 우리 커플은 사실 결혼할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차피 소박하게 시작할거라면 낢 작가의 웹툰 이름처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었다. 그게 더 멋있어보였다. 그래서 빠르게 양가 부모님을 설득했고 4월 중순에 허락을 받아 8월에 결혼했다. 초스피드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우리 같은 학생부부가 부모님의 도움을 최대한 덜 받으면서도 소박하게 시작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보았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았지만 찾아냈다. 은평구 녹번동의 한 빌라였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보안과 시설, 위치 그리고 비용을 고려했을 때 우리에게 최적의 선택. 소소한 산책로와 뒷산이 있고 역에서 5분거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마트와 불광천, 병원들. 2년 동안 여러가지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새로운 식구, 산이가 생겼다.



산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같이 살기 녹록한 녀석은 아니다. 녀석이야 수많은 사연과 에피소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왔겠지만 우리 입장에서 녀석의 행동은 전혀 ​
1도 개연성이 없다. 특히 밤만 되면 울부짖듯이 짖어대는 이놈(시끼) 때문에 이사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 집으로부터 재계약이 4일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게되고, 계약을 포기한 우리는 갑자기 이사를 하게된다.

4일 만에 구할 수 있는 집은 없다. 결혼 3년차 학생부부가 가지고 있는 현금은 보증금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살 집이 없었지만 일단 계획했던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비 오는 새벽,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운 빗 속을 달리며 우리는 당분간 남편의 조부모님댁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러운 이사에 온 시댁 어른들이 출동하셨다.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전혀 준비를 해 두지 않았고 시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밤새 이삿짐을 나를 뻔 했다. 참 감사하다. 오후 7시쯤 새 방에 짐들이 정리되자 신난 산이가 넓은 거실과 방 사이를 웃으며 뛰어다닌다. 남편은 아주 편한 옷을 입고 마침 아랫층에 살고있는 절친한 친구를 데리고 와서 한 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한 쪽에서 글을 쓰며 자리를 잡았다.

조부모님댁에는 여름의 상징인 에어콘도 없고 서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어제부터 오늘 저녁까지 이틀을 지내보니 삶의 지혜를 배우는 순간이 너무너무 많다. 집 안의 조명을 줄이고, 그 때 그 때 먹을 반찬을 조금씩 미리 덜어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 머리를 묶고 시원한 옷을 입고 선풍기 앞에 가만히 앉아 할 일을 하는 것. 동쪽 창문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 햇빛을 받으며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고, 퇴근 후 있는 반찬으로 도란도란 밥 먹은 뒤 천천히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즐기며 글을 쓰는 것. 그리고 토로로록 돌아다니다가 내 곁에 배를 보이고 눕는 산이를 쓰담쓰담 해 주는 것. 참 좋은 시간이다.

천천히 자연스레 이 일상에 녹아드니 녹번동의 어느 저녁이 생각난다. 평소에 타코야끼를 잘 먹지 않는데 그날따라 트럭의 타코야끼들이 먹음직스러워 발을 멈췄다. 10분 정도 기다리라는 타코오빠의 말에 잠시 트럭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코야끼가 거의 다 익어갈때쯤 한 아주머니가 3천원 어치를 주문하셨고 나에게 먼저 드려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한 타코오빠는 재빠른 솜씨로 포장을 했다. 그 때 아주머니가 2천원 밖에 없다며 난감해하시자 타코오빠는 너무 태연한 목소리로 '2천원만 주세요' 하며 타코야끼를 건냈고 아주머니는 그럴 수 없다며 온 가방을 다 뒤져 끝끝내 5백원짜리 두개를 찾아 주고 가셨다.

3천원 중에 5백원도 아니고 천원이나 깎아주겠다고 한 그 마음이 너무 신기해서, 아니 어쩔 수 없이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레 깎아주는 것이 신기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별로 돈에 욕심이 없단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렇게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래 기다린 나에게 타코야끼를 더 넣어주며 "아끼면 안돼요." 라고 덧붙인다.

집에 와서 남편과 함께 즐긴 타코야끼 속에는 말도 안되게 두툼한 문어가 잔뜩 들어가있다. 아끼면 안됀다더니 진짜 팍팍 들어있다. 다음에는 일부러 와서 5천원 어치가 아니라 만원 어치를 사 가겠다고 다짐한다. '아끼면 안돼요. 그래야 이득 보는 거예요.' 잊고 있던 중요한 삶의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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