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날 일기 (수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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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을 사면서 물을 같이 샀다. 어제 남편이 말해주기를 여기서 흔히 마시는 물은 Vovic 볼빅과 Evian 에비앙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비싼 몸 에비앙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여기 오니 1.5L에 600원이다. 한국으로 건너오면 물 건너 온 프랑스 프리미엄이 어마무시하게 붙는듯 하다. 막상 마시니 뭔가 미끌미끌한 느낌이 난다. 수온이 올라가면 더욱 더 역한 느낌이다. 에비앙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졌다. 우리에게는 볼빅이 입맛에 (?) 맞다. 이제는 녹번역처럼 익숙한 Liberté역 앞 Blangerie 블랑제리 빵집에서 바게뜨와 뺑오쇼콜라를 사니 이제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어제는 크루아상 오늘은 뺑오쇼콜라. 하루에 하나씩만 새로운 빵을 하나 사서 나눠먹는다. 하루에 왕창 기쁘기보다는 매일매일 조금씩 기뻐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늘 케밥을 먹었다면 스타벅스 커피는 내일로 양보하는 식? 한국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오늘도 먹고싶은대로 다 먹고, 내일도 또 먹고. 하고싶은대로 다 하면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절제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에 절제가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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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를 타고 Monmarte 몽마르트에 도착했다. 가기 전부터 남편이 잡상인과 야바위꾼, 손목을 잡고 끌어 실팔찌를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한 터라 잔뜩 긴장했다. 메트로에서 내리자 다른 역과는 다르게 계단과 Lift 엘리베이터가 붙어있었다. 사람이 꽤 많이 기다리기에 우리나라의 장애인 노약자용 엘리베이터를 생각하고 젊은 우리는 걸어가자며 계단을 오르는데. 와우. 다른 역과는 차원이 달랐다. 걸어도 걸어도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이 계속 됐다. 언덕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왜 엘리베이터 앞에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지 온몸으로 알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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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 언덕에 도착하자 해가 쨍쨍 밝게 빛났다. 이렇게 예쁜 날 이 언덕에서 Sacré-cœur 샤클레쾨르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너무 쨍쨍해서 눈을 뜨지 못 할 정도로 해가 빛난다. 너무 걱정했던 덕분(?)에 잡상인과 집시들도 많이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몽마르트언덕에서 친구들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즐거워했다는 중국인 피아니스트 손 루이가 생각났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간식과 빵을 먹으며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유명한 곳이어서인지 한국인들이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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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클레쾨르 성당 안에서는 11시부터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가 입장할 때는 11시35분, 미사가 중반부까지 집전되었다. 들어가자마자 돔에 있는 황금색으로 덧칠해진 예수님과 그를 찬양하는 성도들의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오며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예배당 주위를 천천히 돌며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예수님과 그의 부모, 동방박사들이 흑인으로 표현된 목제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들 세 분도 모두 흑인이다. 무엇인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가만가만히 관찰하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갑작스러운 오르간 소리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함께 들려오는 노랫소리. 전율이 일었다.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 미사 중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노래였다. 선창으로 시작한 노래는 합창으로 이어졌다.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스러웠다. 이 성당에서의 노래도 이렇게 좋은데 Taize 떼제는 어떨까. 너무 기대하면 안되지만, 프랑스에서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더욱 궁금해진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건축물과 정성을 다한 그림들. 그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 예술의 힘을 어느때보다 느끼는 파리에서의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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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리에 취해 예배석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보았다. 하염없이 그 음악을 듣고 있고싶었다. 천주교의 미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고 앉으면 함께 앉는다.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남편과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본다. 마음이 내려가면서 낮아지는 느낌이다. 가만히 앉아 방관자가 되지않고 주체자가 되어 참여하는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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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몽마르트, 사클레쾨르 외에 딱히 정해둔 곳이 없었다. 어제 열심히 돌아다녔기도하고 막내동생의 대학 정시 all pass 소식으로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음가는대로 발길닿는대로 머물고싶은대로 편안하게 있기로 정하고 성당을 나와 몽마르트 언덕의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아침에 샀던 사과를 꺼내 물로 살짝 씻어 한 입 베어문다. 우리나라 사과보다 좀 더 단단하고 덜 juicy 하다. 맛은 비슷했다. 모닝사과! 서울에선 비싸서 못 먹었는데 여기서는 4개에 천오백원에 샀다. 서울 물가를 생각하면 굉장한 호사와 사치를 누리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절약도 할 수 있다니! 좋은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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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랑루즈로 가는 길에 우연히 상점이 즐비한 길이 아닌 가운데에 있는 인도로 걷게 되었다. 그 때부터 좌우로 펼쳐지는 상점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의 허름한 상점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인용품샵, 마사지샵, 사우나들. 에로틱한 여자들이 광고모델로 등장하는 가게들의 연속이었다. 인터넷의 후기로 이 지역의 치안이 거의 무정부상태라는 글을 보았는데 확실히 분위기가 어제와는 많이 달랐다. 그 길의 끝에서 찾아간 물랑루즈는 어떠한 감동이 있기보다는 포토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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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돌아갈까 하다가 100m가 안되는 곳에 내가 좋아했던 프랑스영화 Amilie 아멜리에의 카페가 있어 들러보기로 했다. 음식은 그저그렇다는 평. 영화와 사진으로는 너무너무 예쁜 곳이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평범한 동네카페였다. 그렇지만 사진으로는 무척 예쁘게 나온다. 이 영화를 좋아해서 스타벅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아멜리’라는 닉네임을 썼었는데. 새삼 그리워진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면 더 성실하게 학교생활도, 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는 참 많이 아팠고 참 많이 시행착오도 겪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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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여행 가이드북에서 본 많은 카페 중에 유일하게 가고싶다! 라고 느끼고 북마크 해 둔 곳, She’s cake by Shepora 에 가기로 했다. ‘르 피가로’지에서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치즈케이크라는 평을 했다고 한다. 물랑루즈 앞에서 메트로를 타고 Quai de la Rapée 에 내렸다. 여기는 또 다른 느낌의 파리다. 지도로 방향만 확인하고 5분 정도 걸으니 아담한 그녀의 가게가 나온다. 한국의 초이고야 같은 느낌? 작지만 사람들로 꽉꽉 차 있다. 가져가는 것과 먹고가는 것의 가격차가 있다. 우리는 사람도 많고 비용도 절감하기 위해 가져가기로 한다. 어떤 케익을 고를까, 무슨 맛일까 상상하며 찬찬히 둘러보며 점원의 설명을 듣는다. 딸기맛일거라 생각했던 케익은 로즈향을 입힌 케익이었다. 녹차맛인가 했던 케익은 피스타치오였다. 점원은 하나도 뺴놓지않고 일일히 설명해준다. 고민하다 처음에 추천해 준 케익으로 하기로 했다. 바닐라크림과 라즈베리를 올린 Bohemian Raspberry. 🍓이 집의 시그니쳐인 듯. 가장 많이 진열되어있다. 5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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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나와 남편과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집까지는 최소 1시간 거리인데, 걸어갈까 메트로를 탈까. 에너지는 다소 소진됐지만 일몰까지 시간이 넉넉하니 한번 걸어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손을 잡고 한참을 걷는다. 15분정도 걸었더니 뭔가 심심하다. 셀카봉에 핸드폰을 끼고 유튜버 마냥 동영상을 촬영하며 걸어본다. 2분정도 분량. 뭔가 재밌다. 그 에너지로 한참을 다시 걷는다. 다시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또 그 힘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그 기세를 몰아 가방에 남은 바게트 반쪽과 치즈를 꺼내 나눠먹으며 걸어간다. 중간에 빵집이 보이면 들어가서 바게트를 하나 더 사기로 했다. 먹으며 걸어가니 기운도 나고 심심하지도 않다. 마침 빵을 다 먹었을 때 우리 앞에 Blangerie가 나타났다. 들어가니 바게트가 3-4종류가 있다. 차이점이 뭔지 물어보니 밀가루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차이가 난단다. tradition 이라는 빵을 샀다. 평소 먹던 바게트보다 2센트 정도 비싸지만 훨씬 무게가 있다. 바로 조금 잘라서 먹어본다. 맛이 조금 다르다. 훨씬 맛있고 안이 쫄깃하다. 이번엔 라즈베리 잼을 꺼내 빵 반쪽을 찍어 먹으며 힘을 내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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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 쯤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온다. 풍경이 달라졌다. 서울도 지역에 따라서 생활 수준이 다르듯 이곳도 그런가보다. 한눈에 봐도 할램, 빈민촌, 저소득층 주거지역 같은 건물들과 상점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밝을 때는 괜찮지만 어두울 때는 많이 무서울 것 같다. 빵집, 카페, 레스토랑 등이 다른 지역보다 현저히 적고 도심에서는 못 보던 오토바이 수리점, 주유소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지역이 그 쪽으로 특화된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 다녔던 곳과는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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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니 상점과 건물,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변하면서 다른 문화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어 좋다. 또 차도만큼 넓은 인도 덕분에 걷기가 수월하다. 차로가 2차선일때도 인도는 그만큼 넓다. 천천히 말없이 때로는 이야기하며 걷는 이 길이 꼭 성지순례 길 같다. 계속해서 걷다보니 어느 시점에서 잡념이 사라지고 발바닥의 고통과 함께 내 안으로 집중하게 된다. 어쩌면 이번 여행이 진짜로 성지순례와 수행의 일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시간 반 가량 걸으면 하늘을 많이 보게된다. 문득 파리의 하늘에는 전선이 없구나 라는 걸 알게됐다.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전봇대와 전선이 이곳에는 없다. 어제는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탁 트인 하늘을 본다. 알고보니 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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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순간 한계가 왔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500m에 한번은 쪼그리고 앉아 잠시 쉬게된다. 남편은 나보다 어제 더 못 잤고 나보다 더 먹어야되는 사람이 나랑 비슷하게 먹었으니 더 힘이 들텐데 힘든 기색이 없다. 내가 페이스를 못 쫓는다고 짜증내지도 않고 그냥 웃는다. 그런 사람을 보니 나도 기운을 안 낼 수가 없다. 거의 다 왔다는 격려로 나를 독려한다. 힘을 내서 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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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이렇게 걸었던 이유는 파리 시내도 천천히 보고 차비도 5천원 정도를 아껴 까르푸에서 장을 봐서 작은 파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까르푸 😂 여기에 오려고 얼마나 긴 시간을 걸었던가. 거리로는 4-5km쯤. 쉬엄쉬엄 걸으니 한시간 반이 걸렸다. 어제보다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산다. 저렴한 와인도 한 병 사고, 까망베르 치즈와 내일을 위한 크림치즈 (S’moret. 이건 정말 너무 맛있는데 가격도 착하다!), 그리고 오렌지쥬스도 산다. 전부 합해서 7유로, 우리 돈 9천원 정도. 5천원 아껴 걸어온 보람이 있다. 기쁜 맘으로 집으로 향한다. 마음은 기쁜데 발걸음이 힘들어서 무겁다. 그걸 본 남편이 내 가방을 뺏어 자기가 앞으로 맨다. 힘들텐데.. 못 이기는 척 가방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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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다. 평소보다 더 아늑하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 마다 찌릿찌릿하다. 쉬즈케익에서 3시쯤 출발해서 5시에 돌아왔다. 아예 먹고 씻자는 마음으로 테이블에 작은 디너를 차린다. 두 가지 치즈와 잼, 도수가 낮은 과일와인과 오렌지쥬스, 바게뜨 반쪽과 단백질 보충을 위해 참치캔도 하나 뜯었다.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보헤미안 라즈베리. 우리 인생에 이렇게 진하고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맛있는 치즈케익은 없었다. 이건 사먹어야해를 외치며 먹었다. 식탁이 나름 근사하다. 참치 한 입 먹는데 너무 맛있다. 캬 이맛이야! 가 절로 나온다. 한국에서는 잘 안 먹었던 통조림인데 여기서 먹으니 너무 소중한 단백질 에너지원이다. 컵라면도 하나 끓이고 싶지만 호스트와 함께 쓰는 곳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 행복한 저녁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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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정리하는데 남편이 얼른 씻고 오더니 7시도 안됐는데 눕자마자 바로 골아떨어졌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거다. 어쩜 저렇게 묵묵하고 성실하고 든든한지. 연애하면서 느꼈고 결혼해서 더 느꼈던 그의 장점들을 여행 오니 더 많이 느끼고 있다. 참 좋은 사람이다. 함께 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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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파리에서의 첫번째 일정을 마치고 독일 Mannheim으로 떠난다. 원래는 아는 오빠를 만날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틀어져 우리끼리 부딪히게됐다. 지금부터는 기차표도 가서 직접 예매해야하고 독일어 인사도 새로 익혀야한다. 토요일 아침에는 시험도 봐야한다. 아마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을거다. 그래도 기대가 된다.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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