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의 기술
파리, 2017년 2월
머물러 기록한다. 편한 운동화와 물 한 통이면 든든했다.
시간의 향기 (머무름의 기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책 제목이다. Duft der zeit. the smell of time 이라고 번역기가 알려줬다. 아직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제목이고 '개념'이다. 머무름의 기술, 사색의 시간, 멈춤에 대한 이 책을 진정 사랑한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꾸준히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연주하고 가르친다. 가르치는 내용도 그렇게 엄청나진 않다. 최근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 외국가곡들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한 곡, 한 곡의 컨텐츠를 만드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나의 대부분의 수업은 단선율의 가곡을 원곡에 가깝게 연주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냥 듣고 치면 될 것 같지만 이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마치 사파리 투어와 같다. 안전한 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돌면 끝나는 시시한 투어인 것 같지만 사자와 곰, 기린과 원숭이들을 모두 모아 편안하고 즐겁게 배치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어떤 곡을 정하면 제일 먼저 그 곡의 코드를 적는다. 이 코드는 원곡과 나의 '오디에이션(Audiation, inner hearing 내청, 음악교육가 고든의 이론에 등장하는 음악적 능력)에 의해 최대한 쉽고 멋있게(이게 쉽지가 않다) 적는다. 그리고 분석에 들어간다. I, IV, V, 때로는 ii, vi, V/V 또는 다른 화음들. 그러면서 원래 적었던 악보에서 조금 수정이 된다. 그리고 원곡 악보와 비교하며 다시 확인한다. 이런 작업을 기본 70여곡, 그리고 추가 150곡. 그리고 시로 이루어진 가사에 따른 정서를 분석하여 함께 나누려고 하니 꽤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켜켜이 쌓여 악보에 조금씩 조금씩 녹아들어간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종이 한 장. 그러나 신기하게도 학생들은 느낀다. 나의 시간의 향기를.
시간에 향기가 있을까? 시간은 후각과 관련된 개념이 아닌데 어떻게 시간의 향기를 말할까. 초록색. 크레파스의 초록색은 정말 초록초록하다. 정말 온 몸으로 초!록!이라고 말하듯 초록색이다. 도화지에 초록색을 마구마구 칠하는 것은 정말 쉽다. 그러나 아주 단편적이다. 반면 나무의 초록색은 정말 푸르다. 무슨 색이냐고 물어본다면 초록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지만 크레파스의 그것과는 정말 다르다. 신기하다. 천천히 잎이 하나씩 돋아나고 그때그때 다른 햇빛과 물, 땅의 영양분으로 단 하나도 똑같지 않은 초록들이 시간을 들여 생동한다. 도화지의 크레파스도 초록색, 나무의 푸르름도 초록색. 단어는 똑같지만 매우 다르다. 누군가는 그냥 슥 지나갈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초록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왕이면 전자가 되고 싶다. 기왕이면 푸르른 나무의 초록을 전하고 싶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향기를 품은 사람이고 싶다.
완전한 글은 아니지만, 그냥 조금씩 조금씩 남기고 적어본다. '성장문답'에서 말하길,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완벽해야한다는 강박에 얼어붙어 시작조차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실수는 하지말아야겠다. 조금씩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해가야지.